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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립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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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산사

    금산사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7호
    지정일 : 1986년05월20일
    시대 : 1912년
    소재지 : 팔탄면

    1912년 김해(金海) 김씨(金氏)들의 모금으로 선조인 신라(新羅)의 명장(名將) 김유신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우(祠宇)로서 신라의 유학진흥(儒學振興)과 국학(國學)발전에 공헌한 설총. 최치원의 위패도 함께 배향(配享). 봉사(奉祀)하고 있다.

    삼문의 좌우 측에는 1985년 화강암으로 기품 있게 석축(石築)한 기와를 올린 담장이 이어져 사당 주위까지 둘러져 있다. 사당밖에 걸린 금산사중수기(金山祠重修記). 금산사기(金山詞記)등의 현판 내용을 미루어 1912년 창건이래 1935년 1971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重修)를 했음을 알 수 있으며, 2003년 증,개축하였다.

    현재 봄. 가을로 길일을 택하여 일년에 두 차례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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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양홍씨열녀정려문

    남양홍씨열녀정려문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12호
    지정일 : 2001년03월30일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남양동

    조선영조 때 승정원 승지를 역임하였던 삭녕인 최태형의 처 열녀 남양홍씨 부인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남양홍씨는 최태형의 부인으로 조선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경헌공 홍섬의 오대 손인 선릉참봉 홍신상의 딸이다

    부인께서는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주야 간병하고 단지주혈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간병하였으나 돌아가시자 따라죽기를 결심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 하다가 사십칠세에 자결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정조 십일년(1787)에 열녀정려의 명정이 내려져 이듬해 묘 아래에 정려가 건립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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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작홍사용묘역

    노작홍사용묘역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14호
    지정일 : 2002년12월03일
    시대 :
    소재지 : 동탄면

    홍사용시인(1900∼1947)은 1900년 인근 용인시 기흥읍 농서리에서 출생하였으나, 생부를 따라 잠시 서울에서 머물렀을뿐, 서울로 유학가기 전인 16세까지는 석우리에서 살았고 1947년 타계후 이곳 남양홍씨문중의 선영에 안장되어 있으며, 대표적 유작인 나라를 빼앗긴 한을 노래한 서정시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비롯, `봄은 가더이다`등 주옥같은 시·소설·희곡·평론등을 다수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문학 초기 백조 동인지를 발간하였으며, 극단 토월회에 참여 신극운동에 헌신하였고, 일제 암흑기에 혹심한 가난속에서도 회유와 강압을 물리치고 창씨개명은 물론 붓까지 꺾어버린 선비정신의 절개와 지조를 지닌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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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장철효자작

    박장철효자작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6호
    지정일 : 1986년05월20일
    시대 : 1780년대
    소재지 : 동탄면

    효려행과 빈민구제에 헌신한 박장철의 효자각은 별세 후에 유림들이 그의 효행과 선행을 나라에 건의하여 고종 22년 효자 정문의 특지가 내려져 정각을 건립하였다.

    박장철(朴長哲) 1780-1853의 자는 의지,호는 추계(秋溪),본관은 密陽이다.

    그는 어릴적부터 천성이 맑고 어질어 待人接物에 정성과 공경을 다해 당시 사람들의 師表가 되었다.부모에게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효성을 다해 봉양했고 향리에서는 이웃을 돕는 일에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송이 버섯과 쇠고기를 구해 부모님께 잡숫도록 했으며, 가뭄 때 이웃에 불이 나자 솔선한 결과 소나기가 쏟아져 소진시킨 일이 있었다.

    또 純祖 28년(1828) 흉년과 함께 전염병이 창궐했을때는 누구도 꺼리는 환자구호와 빈민구제에 적극적이어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가 별세하자 온 고을이 애도하면서 수백인의 향리 사람들이 공역에 참여했다.

    별세 후 유림들이 공의로 그의 효행과 선행을 나라에 所陳하자,高宗 22년(1885)5월 1일 孝子旌門이란 현액이 달린 현 旌門은 1972년에 重修한 것으로 맞배지붕에 한식기와를 얹은 丹靑의 겹처마집이며 방풍판(防風板)이 달려 있다.내부에는 ‘孝子 贈重蒙敎官朝奉大夫朴長 哲之門 上之二十三年之酉八月 日立' 이라 새겨진 縣板과 효자문의 유래를 알리는 표식문(標識文)이 있다.

    그 규모는 정면 2.5m,측면 1.85m이며 주위에는 벽돌 담장이 둘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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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촌교회

    수촌교회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9호
    지정일 : 1986년05월20일
    시대 : 1905년
    소재지 : 장안면

    1905년 교인 김응태의 주도로 당시 정창하 집에서 7명이 예배를 보던 것이 수촌교회의 효시이다. 3·1운동 당시 일경이 마을 전체를 방화했을 때 전소되어, 1974년 양식기와로 지붕개량을 하였으나 퇴락이 심하여 1987년 본래의 초가형태로 현재의 교회 위치에 새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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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곡서원

    안곡서원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125호
    지정일 : 1984년01월10일
    시대 : 19세기 말
    소재지 : 서신면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초가집으로 대청마루 뒷벽 한쪽에 신주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낼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다.

    초가지붕이지만 부재의 치목과 짜임새는 비교적 견실하며, 19세기말 정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와 사랑채로 튼 ㅁ자형을 이루는 간결한 구성이지만 공간의 내외와 쓰임새를 고려한 평면구성이 돋보인다.

    안채는 ㄱ형 평면으로 동향을 했다. 가운데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남쪽 안방과 부엌이 꺾여 놓이고, 대청 맞은 편에 건넌방을 두었다. 대청에는 뒤쪽으로 벽장을 만들어 신주를 모셨다. 건넌방을 대청마루보다 약간 뒤쪽으로 물려놓고 앞에는 대청과 연속된 툇마루를 두어 안방 및 대청에서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사랑채는 안채보다 약간 북쪽으로 비껴 놓였는데 안대청과 사선방향에 대문칸을 두고 남측으로 2칸의 사랑방, 북측으로 1칸의 문간방을 두었다. 문간방 뒤쪽으로는 외양간, 헛간, 아랫방을 연이어 두어 안마당을 감싸도록 하였다. 사랑방과 문간방 바깥쪽으로 툇마루를 놓아 남성중심의 외부활동을 고려하였다.

    전체적으로 매우 간결한 구성이지만 중농규모 농가의 살림집에서 필요한 공간요소들이 짜임새 있게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사랑채의 다양한 기능이 잘 드러나도록 짜여진 평면구성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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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곤선생효자문

    이곤선생효자문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3호
    지정일 : 1986년05월20일
    시대 : 고종20년(1883)9월
    소재지 : 봉담읍

    이곤의 본관은 원주이며 과의 교위공 한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한 뒤 병조정랑, 선령. 보령. 옹진. 음죽 등의 현감을 지냈으며, 외직에 재임하면서도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모가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추운 겨울날 잉어와 오이가 먹고 싶다고 하자, 이곤은 백방으로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이곤의 지성에 천지신령도 감동한 듯 마침내 강의 얼음속에서 잉어를 구할 수 있었고, 깊은 산 속의 덩굴에 매달려 있는 오이를 기적적으로 얻어 부모를 공경했다고 한다. 그의 극진한 효성은 나라에까지 알려져 영조 13년(1737) 왕후로부터 효행상과 효자정문(孝子旌門)을 하사 받았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현재 정문안에 걸린 현판은 고종 20년(1883) 9월의 것으로 효자정문은 이때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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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루백효자각

    최루백효자각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2호
    지정일 : 1986년05월20일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봉담읍

    고려 의종때 문신이면서 효자로서도 이름이 높던 최루백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정문 비각이다.

    원래의 비각은 봉담면 수기리에 위치해 있었다하며, 현 위치 일대가 최루백의 사패지(賜牌地)였다고 한다.

    현재의 화강암 정려비(旌閭碑)는 조선 숙종때 세워진 것이다. 최루백의 효행은 「고려사열전」「세종실록지리지」「삼강행실도」「동국여지승람」「오륜행실도」뿐만 아니라 중국의 「해동금석원」에도 실려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루백의 본관은 수원이며 호장을 지낸 수원 최씨 시조 최상저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의종때 기거사인(起居舍仁)에 승진되었다. 그후 정언. 좌우사간. 예부낭중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의종 7년 (1153)에는 금나라에 가서 용흥절(龍興節)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2년 뒤에는 평장사(平章事) 최자영,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양원준등과 함께 국정에 관하여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 의종 12년에는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서 국자제주(國子祭酒)염직량과 함께 생원시를 맡아보기도 했으며 후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최루백은 1백살을 넘게 살다가 1205년 12월에 사망하였다. 사후 그는 효숙공(孝肅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최루백의 나이 15세때의 일이다. 그의 아버지 최상저는 수원의 호장으로서 성품이 어질고 재주가 있어 활쏘기에 능하여 틈이 있을 때마다 사냥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 잡혀 먹히었다. 이에 최루백은 (자식된 도리로서 어찌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고 견딘단 말씀입니까)라고 말한 뒤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며 도끼를 들고 단신 산으로 올랐다.

    그는 호랑이의 자취를 더듬어 가던 중에 이미 제 아버지를 잡아먹은 뒤라 배가 불러 누워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였다. 루백은 그 앞으로 달려가 「네 어찌 하늘같이 받들고 있는 나의 아버지를 해쳤느냐, 내 너를 잡아먹어야겠다」고 꾸짖었다. 이 말에 호랑이는 꼬리를 흔들면서 납짝 엎드리는 것이었다. 이때 최루백은 도끼를 들어 호랑이의 머리를 내리치고는 호랑이의 배를 갈라서 아버지의 뼈와 살을 꺼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뼈와 살을 졍결한 그릇에 담아 홍법산(弘法山) 서쪽 기슭에 안장을 하고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최루백이 시묘살이를 하던 어느 날, 잠이 잠시 들었는데 아버지의 혼령이 나타나 시를 읊으기를 「가시 덩굴 헤치고 효자의 여막에 이르니/마음 속 느끼는 것이 많아 눈물이 그치지 않네/흙 져다가 날마다 무덤 위에 얹으니/ 이 뜻 아는 건 밝은 달과 맑은 바람뿐이네/살아서 잘 봉양하고 죽어서 지켜주니/ 그 누가 효의 처음과 마침이 없다 하리요」 하였다.

    최루백은 삼년 시묘살이를 마치고 항아리에 묻어 두었던 호랑의 고기를 꺼내어 모두 먹었다고 전한다. 정몽주는 최루백을 가리켜 「동방의 유종(해설: 유학에 통달하고 품행에 모범을 보여 우러름을 받는 학자)이라 칭송하였으며 세종대왕은 삼강행실도에 그의 효행을 싣게 하여 만인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또한 정조는 융릉 남쪽에 있던 효숙공 최루백의 비각을 서남쪽 홍범산 기슭으로 옮겼으며 최루백이 태어난 마을을 효자동으로, 호랑이를 잡은 뒷산의 큰 바위를 효암이라 명명하고 그의 자손에게 부역을 면해 주었다고 한다. 최루백의 효자비각 바로 뒤편에는 그의 아버지 최상저의 유허비(遺墟碑)비각이 건립되어 있다. 최루백의 효자비각은 봉담면 분천리 165-1번지에 소재해 있으며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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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윤식기념비

    최윤식기념비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11호
    지정일 : 1999년10월18일
    시대 :
    소재지 : 정남면

    최윤식 선생(당시 27세)은 당시 향남면사무소에 근무하였던 분으로 1939년 8월 15일 정남면 문학리 봉황동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자 용감히 뛰어 들어가 불을 끄다가 장렬히 순직하여, 장한 희생정신이 타의 모범이 되도록 징표를 비문에 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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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윤,박행장충열각

    한명윤,박행장충열각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5호
    지정일 : 1986년05월20일
    시대 : 1945년
    소재지 : 양감면

    조선 선조때의 충신 한명윤과 열녀 박행장 부인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충신·열녀문이다.
    한명윤의 자는 매숙, 본관은 청주이며 선조 1년(1568) 사마시에 합격, 태학의 천거로 연은전 참봉이 되었다. 선조 23년(1590) 영동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던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활약, 그 이듬해 상주목사 겸 방어사로 왜적과 싸우다가 이 해 10월 전사하였다. 이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어 고향인 이곳에 충신문이 세워졌다.

    한명윤이 출전하는 길에 박행장 부인에게 멀리 피신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박씨부인은 결연히 함께 죽음을 택하기를 원하면서 극구 피신하지 않았다. 얼마후 왜적이 침입하자 가솔들의 간청을 뿌리치고 `내 어찌 구차하게 살기를 원하겠느냐` 하면서 비수로써 자결했다.

    선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이곳에 열녀문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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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담효자각

    홍담효자각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4호
    지정일 : 1986년05월20일
    시대 : 1539년
    소재지 : 서신면

    조선중종때 문신으로 이조판서까지 역임하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사후에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맞배 지붕에 한식 기와를 얹은 겹처마 건물로서 8각(角)의 장초석(長楚石) 위에 4개의 원주형(圓柱形) 목주(木柱)가 세워져 있고 방풍판(防風板)이 달려 있다.

    정문(旌門)내에는 ‘효자(孝子)좌참찬(左參贊)홍담지문(洪曇之門)'이라 새겨진 현판(縣板)만 걸려 있을 뿐 별다른 기명(記銘)은 찾아 볼 수 없다.

    현 건물은 1986년 11월 보수로 말끔히 단장되어 있는데, 규모는 정면 2.37m,측면1.83m이다.

    홍담(洪曇)(1509-1576)은 조선전기(前期)의 문신으로 자(字)는 태허(太虛), 본관(本寬)은 남양(南陽)으로 언광(彦光)의 아들이다. 중종(中宗) 34년(1539) 별시문과(別試科)에 급제한 뒤 정자(正字).교리(校理).응교(應敎).이조정랑(吏曹正郎).도승지(都丞旨)등을 역임하고, 명종(明宗) 10년(1555)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사헌(大司憲).병조참판(兵曺參判).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등을 역임하고,선조(宣朝)때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우참찬(右參贊).예조(禮曺)와 호조(戶曺)의 판서(判書)를 거쳐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특히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에도 부모에 대한 효성(孝誠)이 지극한 바 있어 별세한 뒤 고향인 이곳에 효자 정문이 세워져 생전에 극진했던 효행을 기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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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한묘역

    홍한묘역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10호
    지정일 : 2001년03월30일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서신면

    홍한은 조선시대 연산군때 문신으로 예종 1년(1469)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성종16년(148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연산군 4년에 이조참의에 이르렀으나, 이해 무오사화때 연류되어 경흥으로 귀양가는 도중 정평에서 죽었다.
    홍문관에 있으면서 연산군의 후원관사를 논계한 일로 부관참시를 당했으나 중종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이 묘소는 남양홍씨 묘역중 제3지역에 해당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부인 창녕최씨와 쌍분으로 문인석 1쌍과 봉분 좌측에 향으로 있는 묘갈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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