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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립도서관

지역정보안내 Local Info

  • 남양읍
  • 우정읍
  • 태안읍
  • 花樹里(화수리)
    구한말 이후 마을 주민들이 부지런하고 애향심이 강할 뿐만 아니라, 인근 사나에 많은 유실수를 심어 마을 주위가 꽃과 나무로 어울어져 아름다운 경관을 나타냈으므로 화수리(花樹里)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굴원이(屈原里) 조선조 말 이곳의 행정구역 里名은 우정면 굴원리(屈原里)였다. 이것은 마을의 형태가 길고 구불구불하게 생 겼다고 해서 굴원이(屈原里)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花山里(화산리)
      이 마을은 옛부터 둥글고 낮으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여 봄과 산과 들에 진달래를 비롯하여 꽃들이 어울어져서 화산리(花山里)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 배미·栗里 옛날 이 마을 주위에는 밤나무가 많이 자생, 밤나무골즉 밤이로 불리다가 배미로 전음되었으며, 율리(栗里)라고도 부른다.
  • 虎谷里(호곡리)
    옛부터 마을 주위 산의 현세가 호랑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범아지로 불리다가 뒤에 호곡리(虎谷里)로 개칭되었다.
    • 百年居地 조선조 仁祖 14년(16360 內子胡亂 때 정창연이라는 사람이 학뿌리에 3년간 머무는 동안 이곳이 피난처로 적 합, 백년은 거쳐할 수 있다고 하여 그 뒤 백년거지(百年居地)라 불리게 되었다.
    • 범아지 마을 주위 산의 지형이 호랑이의 형상이라 하여 범아지로 불리다가 뒤에 호곡동(虎谷洞)으로 개칭되었다.
  • 閑角里(한각리)
    옛날 이 마을 뒷산은 학이 많이 날라 와 학뿌리로 불렸으나 긔 뒤 한뿌리로 전음되어 불려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한각리(閑角里)로 개칭되었다.
    • 솔안(松內)·松內洞 옛날 이 마을에 살던 崔氏가 나무를 잘 가꾸고 산 관리를 잘하여 老松이 우거지게 되었으므로 인근에서 송내 동(松內洞) 또는 솔안말(松內谷)이라 불렸다.
    • 죽말(竹里洞) 옛날부터 이 마을에는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죽마을(竹里)→죽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 珠谷里(주곡리)
    珠谷里(주곡리) ] 마을 앞산에는 둥글게 생긴 바위가 많아 마치 구슬처럼 보이고, 인심 또한 후하고 둥글다 하여 구슬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주곡리(珠谷里)라 부르게 되었다.
    • 구슬 마을의 인심이 둥글둥글 하고, 산의 지형과 바위 또한 구슬처럼 둥글다고 하여 구슬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 고 한다.
    • 바소개 전설에 의하며, 조선조 중엽 전국이 가뭄으로 흉년이 들자 ?宗이 민심을 살피고자 이곳에 순행하게 되었다.
  • 朝岩里(조암리)
    조선조 말 이곳의 행정구역 이명은 압정면 朝岩里였다. 옛날 이 마을 안에는 차돌바위가 있어 아침해가 솟을 때 그 광채가 사방으로 퍼져 아름답게 보이므로 아침돌(朝岩)이라 부르다가 한자명으로 조암리(朝岩里)라 부근 것이라고 한다.
    • 낡은아실(舊衙室) 옛날 이 마을에는 지방 官衙가 있었으나 없어진 후 그 곳에 마을이 생기자 옛관아가 있던 마을이라는 뜻에 서 ;구아실(舊衙室)이라 쓰다가 낡은 아실이란 우리말로 불려지게 되었다.
  • 梨花里(이화리)
    조선조 말 이곳의 행정구역 이명은 압정면 舟谷里였다. 옛날 이마을 앞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여 뱃골(舟谷)이라 불려왔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행정 당국에서 배 다니는 골(舟谷)을 배골(梨谷)로 잘못 알아서 오늘의 이화리(梨花里)란 이명이 통용되게 되었다.
    • 당골(堂谷)}
      구한말 당시 이 마을에는 5집이 있었는데, 그 중 徐氏 집에 후손이 없어 걱정하던 중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앞산에 堂을 짓고 백일기도를 드린 결과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고 하며, 그 뒤 이곳은 당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당골(堂谷)로 불리게 되었다.
    • 德目洞
      옛날 이 마을에 韓氏 와 金氏 두 성이 살았는데, 상부상조하며 안팍이 화목하게 산 결과 인근에서 덕목동(德目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孟串
      조선조 말 이곳의 행정구역 이명은 압정면 孟串里였다. 옛날 이곳에 孟氏가 처음 산 고지(串)+안(內)이라는 뜻에서 맹곶(孟串)이 되었다는 설, 그리고 마을의 지형이 누에고치와 비슷하게 생긴 고지(串) 안(內) 동네라는 뜻에서 뱅곶·맹곡(孟谷)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두 설이 있다.
    • 벌말
      마을이 평평한 들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벌말이란 이름으로 불려졌다.
    • 사두곶
      옛날에는 사두질을 하며 바닷고기를 잡던 곳인데, 1960년대 汾鄕灣이 간척공사로 막히게 되자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사두곶이라 불리게 되었다.
    • 안골(內谷)
      옛날 이마을이 처음 형성될 때 不老山에서 보면, 이 마을 골짜기가 안쪽으로 보여 內谷의 뜻인 안골 또는 안골으로 불리게 되었다.
    • 梨谷洞
      조선조 말까지 이곳은 배가 마을 앞까지 드나든다고 하여 배골(舟谷)이라 통용되었는데, 1914년 무지한 일제의 행정 당국자들이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배가 다니는 골(舟谷)을 배골(梨谷)로 잘못 알고 이곡동(梨谷洞)이라 표기했던 것이다.
  • 元安里(원안리)
    조선조 말까지의 행정구역 이명은 우정면 元案里였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조 중엽 李氏 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우물을 파게 되었다. 그런데 샘이 터져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마침 길을 지나던 道師가 큰 바윗돌로 막아 주니, 이때부터 샘이 알맞게 나오고 마을이 편안하게 되어 원안리(元安里)란 이름이유래 되었다는 것이다.
    • 巨物洞
      조선조 말까지 이곳의 행정구역 이명은 거물리(巨物里)였는데 그 유래는 조선조 중엽 延安 金氏 성을 가진 고관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 이곳에 살면서부터 거물도(巨物洞)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널우물
      옛날 마을 한 가운데 샘이 잘나는 우물이 있었는데, 널판으로 우물을 만들었기 때문에 널우물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달무지
      옛날 이 마을에 글에 통달한 인재가 많아 달문(達文)이라 부르다가 달무지로 변했다는 설, 그리고 마을 앞에 달처럼 둥글게 생긴 연못이 있어 달못이라 부르다가 달무지 또는 월지(月池)라 부르게 되었다는 異設이 있는데, 후자의 설이 유력하다고 하겠다.
  • 雲坪里(운평리)
    조선조 말 이곳 행정구역 이명은 우정면 雲井里와 坪田里였는데, 이 두마을이 통폐합될 때 오늘의 운평리(雲坪里)가 되었다.
    • 구름울(雲井洞)
      옛날 이곳은 산이 구름처럼 둘러 있고 마을 한가운데는 샘이 잘 나는 우물이 있어 구름울(雲井洞)이란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조선조 말까지의 이명은 운정동(雲井洞)이었다.
    • 벽장골
      이곳은 본 마을과 동떨어진, 산이 험한 외진 곳에 위치해 벽장골이 되었다는 설, 도 이곳이 마을 첫 어귀에 위치해서 벽장골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 평밭(坪田洞)
      조선조 말의 행정구역 이명은 坪田里로서, 이 마을은 밭과 같이 평평한 곳에 위치했다는 뜻에서 평밭(坪田洞)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 石川里(석천리)
    옛부터 돌이 많아 돌팍산이라 불리는 산 아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마을 앞에는 고시내라는 큰 내가 있었던 연고로 석천리(石川里)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 佳來
      조선조 말엽 그네 뛰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추천말( 韆谷)이라 불리다가 정자말(亭子谷)로, 그리고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이 고온포(古溫浦)에서 배를 타면서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극찬, 가래(佳來)란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 낭개(浪浦·川)
      옛날 물이 이 마을 앞까지 들어 왔을 때 다른 곳보다 특히 이곳에서 물결이 심하게 굽이 쳐 이때부터 낭포(浪浦) 또는 낭개(浪川)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돌패기
      마을 뒤에 위치한 돌팍산 돌이 많이 묻혀 있어, 인근 사람들이 돌파는 곳이라는 뜻으로 돌패기란 이름을 붙히게 되었다고 한다.
    • 오류올(五柳洞)
      옛날 이 마을의 주변은 숲이 우거지고 버드나무가 심어진 골짜기에 흐르는 물이 어우러져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陶淵明의 무릉도원을 본따 이곳을 오류동(五柳洞)이라 부르다가, 뒤에 오류올로 轉化되었다.
  • 覓祐里(멱우리)
    조선조 말 당시의 행정구역은 우정면 멱동(覓洞)이었다 (<華城誌>참조). 口傳에 의하면 구한말 때 일본 군인이 한국 여인을 애첩으로 삼아 임신시킨 바 있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는 민족의 수치라고 하여 여인을 찾아 참수시킴으로서 찾을 멱(覓)자와 도울 우(祐)자를 따서 멱우리(覓祐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가래골
      옛부터 마을 뒷산에 가래나무가 무성하여 가래골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 防築洞
      조선조 말의 행정구역 이명은 우정면 防築里였다. 옛부터 이 마을 앞에는 광활한 들판이 있었으나, 관 개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가뭄을 만나면 흉년이 들기가 예사였다. 그리하여 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든 이후 이곳은 방축리(防築里) 또는 방축동(防築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서리실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형세가 뱀이 서리고 있는 형국이라고 해서 서리실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은행나무골(杏亭洞)
      옛날 마을 한가운데 크고 오래 묵은 은행나무 정자가 있어, 은행나무골(杏亭洞)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 창말(倉村)
      조선조 말까지의 행정구역은 우정면 창촌(倉村)이었다. 조선후기 英祖 때 柏山 아래 설치되어 있던 雙阜倉이 이 마을로 옮겨짐에 따라 양곡 곳집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창말(倉村)이 유래되었다.
  • 梅香里(매향리)
    원래 고온포(古溫浦)라 했는데, 전설에 의하면 옛날 서원과 구장이라는 두 문장가가 마을 이름을 지을 때 서원은 매(梅)자를, 구장은 향(香)자를 짚어서 매향리(梅香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可老地
      조선조 중엽까지는 鄕音으로 가을오지(加乙吾地)라 불러 오던 것이 점차 오늘의 가로지(可老地)로 전화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 正祖 때의 實學者 燕岩 朴趾源이 淸나라에 다녀올 때 이곳이 노후에 낙향하여 살만한 땅 이라 했다고 하여 한자음으로 가로지(可老地)라 부르게 된 것이라는 전설되 있다.
    • 古溫里
      조선조 말 행정구역은 압정면 古溫里浦로서, 옛부터 마을의 인심이 좋고 이웃과 화목한 생홀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지형적으로 해안에 위치하여 기후가 따뜻한 관계로 고온포(古溫浦) 또는 고온리(古溫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古棧
      內陸쪽으로 자리잡은 마을, 곧 고지(串) 안(內)의 뜻에서 유래되었다.
    • 놋우물
      일제 말기에 놋그릇 공출이 극심하여, 주민들이 마을 앞 공동 우물 속에 놋그릇을 감추었다는 데서 놋우물이란 이름이 유래되어 전화된 것이라 한다.
  • 雨汀面(우정면)
    원래는 仇花島였다고 하며, 구한말 때까지 우정면 梅香里였으나, 1916년 10월 27일 매향리에서 분리, 국화리(菊花里)로 개칭되었다.
  • 菊花里(국화리)
    원래 구화도(仇化島)였다고 하며 구한말 충청도지사와 경기도지사가 관할 구역을 정할 때 본 섬에서 표주박을 띄웠더니 우정면 매향리에 도착하여 경기도 관할의 매향리에 속하게 되었다 하며 1916년 10월 27일 고시 제56호로 매향리에서 분리되면서 지명이 좋지않다고 하여 국화리로 개칭하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