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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립도서관

지역정보안내 Local Info

  • 당성

    당성
    지정번호 : 사적 217호
    지정일 : 1971년 04월 15일
    시대 : 삼국시대
    소재지 :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 32
    문의처 : 화성시 북양동 642
                ☎ 031-356-2060

    삼국시대에 축조된 이 당성은 서신, 송산, 마도 3개면의 경계선이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소재하고 있으며,
    성의 높이는 약 2.5m, 하단부의 폭은 7∼8m이며, 성둘레는 약 1,200m이나,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1993년부터 성곽복원작업을
    하고 있다. 이 성은 신라가 이 곳을 개축하여 '당항성' 이라 하였고,

    서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통 요충지로 활용되었으며 남양홍씨의 발상지로 전해지고 있다.


    성의 둘레는 내성 1150m, 외성 300m, 높이 3m로 외벽은 석축, 내벽은 토축이었는데 지금은 성지만 남아있고 성내의 망해루도
    초석만 남아 있다.


    백제 후기의 전형적 축성방식을 보이고 있어, 처음에는 백제가 축성하였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고구려가 축조한 성으로 신라가 점유한 후에는 당항성이라하여 중국과의 교역의 관문이었으며, 신라 말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강화의 혈구진, 완도의 청해진과 더불어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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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아미타불좌상

    목아미타불좌상
    지정번호 : 보물 제980호
    지정일 :1989년04월10일
    시대 : 1362년
    소재지 :남양동
    문의처 : 화성시 북양동 642
                ☎ 031-356-2060

    이 불상은 1979년 개금때 발견된 복장전적에 의하여 고려 공민왕 11년(1362)에 아미타불상으로 조성된 사실이 밝혀졌다.

    얼굴은 단아하고 엄숙하며 체구 역시 단정하면서 건장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U형으로 처리된 젖가슴을 Ω형으로 표현하고,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가스의 전면을 들어내고 있으며, 3줄의 옷주름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고려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목아미타불은 머리모양이 큼직한 편이고 얼굴은 둥근편이며 눈은 수정이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있다.

    남양동에 위치한 봉림사에 소장하고 있는 목존불은 1362년에 제작된 것으로 형세는 머리가 큰 편이고 얼굴은 둥근 편이며 전체적 으로 균형미가 잘 잡혀 있어 예술적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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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아미타불좌상복장전적일괄

    목아미타불좌상복장전적일괄
    지정번호 : 보물 제1095호
    지정일 :1991년09월30일
    시대 : 1378년
    소재지 : 태안읍
    문의처 : 화성시 북양동 642
                ☎ 031-356-2060

    봉림사 대웅전 앞뜰에는 1979년 대웅전 목존불(목조여래좌상)의 복장(腹藏)에서 나온 사리를 봉안키 위해 건립한 삼층석탑이 있다. 1979년 초여름 목존불의 개금불사(改金佛事)때, 그 복장에서 희귀한 복장품이 나와 학계의 관심을 모으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복장품은 사리병을 비롯하여 전적류, 섬유류, 종자류, 각종구슬류, 부적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이들 중 전적과 삭아버린 섬유류를 제외하고는 원상복구 하기위해 개금후 재장하였으며, 사리는 탑을 건립하여 그곳에 봉안하였다.

    불복(佛腹)에서 나온 전적은 사경(寫經)과 간본(刊本)을 합쳐 모두 8종인데,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불복에서 나온 전적은 대방광불화엄경, 묘법연화경, 범망경, 과주묘법연화경, 금강반야바라밀경 2부,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 범총지집 1부이다.

    목아미타불여래좌상은 목존불로 남양동 북양리 봉림사에 소장하고 있으며, 복장전적은 용주사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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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종

    범종
    지정번호 : 국보 제120호
    지정일 : 1964년03월30일
    시대 : 고려시대
    소재지 : 태안읍
    문의처 :

    고려시대 범종으로는 한국 종의 양식을 가장 충실히 갖추고 있다. 정상에는 음통과 용누가 있으며, 견대는 상하에 연주문을 두른 속에 상하로 반원을 어긋나게 연접시키고 종신은 전후에 비천, 좌우에 삼존상과 4곳에 당좌가 있다. 비천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르는 형상이다.

    고려 초기의 범종이라고 하지만 드물게 보는 큰 규모이며 신라시대의 범종 양식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다.

    종의 정상부에는 신라 종에서 볼 수 있는 용뉴와 용통이 있으며, 용머리는 종 정상부위 보주(寶珠)를 물어서 두 발로 종의 정상부인 천판(天板)을 잡고 종 전체를 들어올리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용통은 연주문(蓮珠紋)을 돌려 여섯 단으로 구분을 하고 당초문과 연꽃잎으로 장식하였다. 천판에는 아무 장식이 없고 상대와 하대의 무늬는 서로 다른 무늬를 하였다.

    상대의 경우 신라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원권(半圓圈)아래위에 서로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 당초 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종 밑에 돌린 하대에는 연소된 당초 무늬로 장식하였다.
    또 하대의 무늬에 당초가 한번 돌아갈 때마다 그 중앙에 8엽 내지는 9엽의 연꽃 무늬를 독립하여 배치하였다.

    유곽의 문양대는 안쪽과 바깥쪽의 작은띠 주변에 연주무늬 띠를 두르고 그 가운데에 서로 연결되는 당초 무늬 띠를 둘렀다. 유두는 둥근 연꽃잎 위에 도드라져 각 유곽마다 아홉 개씩 있다. 종신 아래 둥그런 당좌의 가운데 부분은 8엽의 연꽃 무늬를 새기고 그 밖으로 연주무늬 띠를 돌렸다. 그리고 연주무늬를 다시 두르고 가장 바깥 띠에도 연주 무늬를 돌려 새김으로써 마무리하였다. 종신에는 비천을 두 곳에 새겼고 그 사이사이에는 연화 좌우에 결가부좌한 삼존불상을 조각하였다. 보살의 천의(天衣)자락이 하늘을 향하고 있어 마치 천상세계에서 내려오는 듯한 형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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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융건릉

    융건릉
    지정번호 : 사적 제206호
    지정일 : 1970년05월26일
    시대 : 조선 정조시대
    소재지 : 태안읍
    문의처 :

    융릉은 영조대왕의 세자로서 후에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일명 사도세자)와 경의왕후로 추존된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정조대왕은 그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죽음을(뒤주속에 갇혀 죽음)애석해하며 양주 배봉산에서 현재의 화산으로 옮겼는데 어느날 아버지의 능 주변 소나무에 송충이가 대단히 많이 번식하여 소나무를 갉아먹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행차를 서둘러 산에 와보니 송충이의 기승이 말이 아니었다.

    정조가 진노하여 송충이를 잡아 깨물면서 “아무리 미물일망정 네 어찌 내가 부친을 그리워하여 정성껏 가꾼 소나무를 갉아 먹느냐”고 꾸중하자 송충이가 사라졌다는 일화가 있다. 건릉은 조선 제22대 정조와 동비 효의왕후의 합장릉으로 동릉이실이며, 병석없이 난간만 두르고 그외 모든 상설은 융릉과 같다. 문무석의 조각이 극히 사실적이며 안정감이 있는 수작으로 문관은 금관조복을 입고 있다.

    융건릉은 용주사와 함께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유적으로 우리고장의 효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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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용래가옥

    정용래가옥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125호
    지정일 : 1984년01월10일
    시대 : 19세기 말
    소재지 : 서신면
    문의처 : 화성시 북양동 642
                ☎ 031-356-2060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초가집으로 대청마루 뒷벽 한쪽에 신주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낼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다.

    초가지붕이지만 부재의 치목과 짜임새는 비교적 견실하며, 19세기말 정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와 사랑채로 튼 ㅁ자형을 이루는 간결한 구성이지만 공간의 내외와 쓰임새를 고려한 평면구성이 돋보인다.

    안채는 ㄱ형 평면으로 동향을 했다. 가운데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남쪽 안방과 부엌이 꺾여 놓이고, 대청 맞은 편에 건넌방을 두었다. 대청에는 뒤쪽으로 벽장을 만들어 신주를 모셨다. 건넌방을 대청마루보다 약간 뒤쪽으로 물려놓고 앞에는 대청과 연속된 툇마루를 두어 안방 및 대청에서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사랑채는 안채보다 약간 북쪽으로 비껴 놓였는데 안대청과 사선방향에 대문칸을 두고 남측으로 2칸의 사랑방, 북측으로 1칸의 문간방을 두었다. 문간방 뒤쪽으로는 외양간, 헛간, 아랫방을 연이어 두어 안마당을 감싸도록 하였다. 사랑방과 문간방 바깥쪽으로 툇마루를 놓아 남성중심의 외부활동을 고려하였다.

    전체적으로 매우 간결한 구성이지만 중농규모 농가의 살림집에서 필요한 공간요소들이 짜임새 있게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사랑채의 다양한 기능이 잘 드러나도록 짜여진 평면구성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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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용채가옥

    정용채가옥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124호
    지정일 : 1984년01월10일
    시대 : 1700년경
    소재지 :서신면
    문의처 : 화성시 북양동 642
                ☎ 031-356-2060

    이 가옥은 대체로 서쪽의 낮은 산줄기를 등에 지고 동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건물의 평면은 크게 안채 공간과 사랑채 공간으로 나뉘고, 앞쪽에는 행랑(行廊)채가 길게 놓여 내정(內庭)을 구획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보아 월자형(月字形)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남쪽에, 사랑채는 북쪽에 위치하여 주로 사랑채 옆에 솟을 대문으로 세운 대문간을 통하여 출입하도록 되어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공간은 안채와 행랑채 사이에 마련된 협문(夾門)이 있어 그 남쪽에 있는 우물 및 텃밭을 통하여 외부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다.

    대문에 기록된 묵서(墨書)에 의하면 고종(高宗) 24년(1887)에 세운 것으로 보이나 안채는 이보다 시기가 앞선 것으로 추측된다. 건물의 꾸밈은 대체적으로 잘 깎아 놓은 주초석(柱礎石) 위에 각주(角柱)를 세우고 부부연없이 홑처마 납도리의 3량 혹은 5량집으로 꾸몄는데 그 결구가 견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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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지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지
    지정번호 : 사적 제299호
    지정일 : 1982년12월21일
    시대 : 일제강점기
    소재지 : 향남면
    문의처 :

    1919년 3·1운동 당시 이 지역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3월 31일과 4월 5일 이곳 주민들이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이자 일본군경은 4월 15일 제암리 교회에 주민들을 감금한 뒤 불을 지르고 무차별 총격을 가함으로써 23명을 학살하고, 근처의 팔탄면 고주리에서도 또다시 6명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다.
    1959년 이곳 교회 자리에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1982년도에 현재의 3·1운동 순국기념탑을 다시 건립하였다. 2001년 3월 1일에는 제암리 3·1운동순국 기념관을 건립하여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그날의 생생한 기록들을 전시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는 수원에서 남서쪽으로 약 20㎞지점에 위치한 조용한 농촌마을로서 일명 두렁바위라고도 불려지는 이곳은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시 국권회복을 위한 만세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곳으로 특히 4월5일 이곳 주민들이 발안장터 에서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이자 만세운동에 대한 주모인사명단을 입수한 일본헌병 30여명이 4월15일 오후 2시경 제암교회에 주민을 모이게 한 뒤 모든 문을 폐쇄하여 감금시키고 교회에 불을 지른후 교회를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23명을 학살하고 30여 채의 가옥을 불태워버린 선조의 한과 넋이 서린곳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이 있은지 63년이 지나서야 마을에서 4㎞떨어진 도이리 공동묘지에 평토장으로 안장되었던 유해를 발굴하여 제암교회 뒷동산 양지바른곳에 유택을 마련 하였으며, 후세에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와 기념관, 교육관 조형물 등을 설치 하여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 하고 있다.

    주변관광지 : 남양호, 입파도, 선창, 월문온천, 제부도 발안CC

    제암리기념관 : http://www.jeam.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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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주사

    용주사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
    소재지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습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습니다. 전국 5규정소(糾正所: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 중의 하나가 되어 승풍을 규정했으며,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했습니다.

    또한 일찍이 31본산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80여개의 말사, 암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현재 절의 신도는 약 7천여 세대에 달하며 정기, 비정기적으로 많은 법회가 이루어지고 또 법회를 통해 교화활동을 행하고 있습니다. 용주사는 이와 같은 수행자들이 모여 면벽참선하면서 진리를 찾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대중포교 활동을 통해 부처님의 지혜를 전하며, 또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효행교육원을 설립, 운영을 통해 불자교육을 서원으로 일반인도 누구든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효행교육으로 불교신행관과 인성교육을 사회로 회향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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